계절학기 등록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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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방송대 공부는 지난 학기에 무려 두 개나 F를 만들어 주춤했지만, 그래도 이번 3번째 학기도 등록해서 그럭저럭 진행중이다. 늘 다짐하는 1일 1강의는 결코 못지키고 있지만 그래도 기간 안에 과제도 잘 제출했고…

이제는 슬슬 재수강이란 것도 해서 학점을 메꿀 때가 온 것 같아(..) 계절학기 등록을 시도. 개인적인 소망은 특히 영국소설 쪽을 만회할 수 있길 바랐지만… 아예 개설이 되지 않았다. 결국 생활과 건강 한 과목만 건짐. 이거 과제 점수도 잘 받았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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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이해 과제 작성을 위해 구입했던… 교재의 참고 문헌들 중 한 권이었는데, 솔직히 이 책은 너무 어려웠다.😒  두껍지는 않은데 어찌나 어려운 단어로 길고도 복잡하게 쓰여 있는지…;;

내가 이해한 대로라면  [현대 사회 불안의 원인은 개인주의와 현대화]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자기 진실성을 추구하는 이들을 마냥 이기적이라 비난하는 꼰대가 되어선 안됨] [사회 문제에 관해 단번에 가능한 빠르고 절대적인 해결책이란 없다] [서로 싸우지만 말고 더욱 높은 곳을 봐야 한다] 같은,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들만은 아닌 것 같은데……교수님들은 다 그래야 하나요(..)  책 뒤에 부록으로 실린, 역자 송영배 교수님이 역시 저명한 교수인 저자에게 쓴 팬레터(저의 수준낮은 표현에 용서를..🙂) 비슷한 편지가 왠지 기억에 남는다…

나는 내향적일까, 아니면 그냥 무례한 걸까?

Last updated on : 2017/05/06

원문 링크: Am I Introverted, or Just Rude? By Kj Dell’antonia, www.nytimes.com
나는 내향적일까, 아니면 그냥 무례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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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매우 외향적인, 친한 친구이자 동료 하나가 내가 좋아할 만한 티셔츠의 링크를 보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티셔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저는 여기 오고 싶지 않았거든요.”

내가 웃었냐고? 물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친구가 외향적인 만큼이나 나는 내향적이고, 우리는 자주 함께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곤 한다. 파티에서는 그녀가 리드한다. 회의에서는 그녀가 말하는 역할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짓는 역할이다.

그러나 그 티셔츠는 동시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는데, 나의 내향성을 뭔가 변명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의심을 완벽히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는 수줍음이 많다. 그런데 무례하기도 하다? 나의 예의와 선호 중에 선호를 우선시한다는 말인가?

내향적인 사람들 중 소수는 병적인 사회 불안 장애로 고통받는다. 나에겐 해당사항이 아니다. 나는 파티가 불편하다. 나는 잡담을 하는 것이 힘들고, 사람들 속에 너무 오래 있은 다음에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내 성향을 잠시 치워둘 줄 알며, 삶의 대부분 해왔던 일도 바로 그것이다. 나는 파티에 참석했다. 잡담을 나누었다. 또한 예절이 중요시되는 세상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나는 거기서 좀 더 신경썼다. 낯선 이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결혼식 때는 혼자 계신 친척 어른에게 다가가 신부에 대한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나는 좋은 손님이었고, 또 필요할 때는 좋은 파티 주최자였다. 어머니는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다 수잔 케인의 “콰이어트 :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 을 필두로 내향성 대란이 일어났다. 갑작스레 사교성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고, 내향성은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멋진 것이 되었다. 저명한 심리학자 브라이언 리틀은 대중 앞에서의 연설 막간에는 화장실에 틀어 박히며, 심지어는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변기 위에 발을 올리고 있기까지 한다는 것이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군부와 실리콘 밸리의 리더들은 재충전과 회복을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선언했다.

아마도 필연적이었을 너드 문화의 성장 속에서, 사교적인 성공으로 대표되는 데일 카네기적 이미지는, 회의에서는 조용히 앉아있고 현실 세계에서의 만남을 세심하게 제어된 온라인 대화로 대신하는, 영향력있고 출세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들이 그래도 되는데, 왜 나는 안되는가?

2013년, “콰이어트”의 출간과 비슷한 시기쯤에 나는 마흔이 되었고 어느 정도 내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었다. 그것은(콰이어트) 마치 그렇게까지 열심히 노력할 필요 없다는 허락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기금 모금 행사들과 나를 예민하게 만드는 커피(를 사람들과 마시러 가는 것?)에 대해 “싫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 거의 사악한 기쁨이었다. 이렇게나 자유로울 수가! 나는 남아서 잡담하는 대신 회의들과 학교 모임들에서 가능한 한 일찍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아주 좋았던 날에는 아이들이 가족 운동회에 참가한 동안 나는 차 안에 앉아서 책을 읽기도 했다.

그 모든 일들은 쉽게 변명 가능했다. 나는 친구들을 무시하고 있다거나, 동료 학부모들을 피한다거나 공동체를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에너지를 보존하고 스스로를 돌보며, “또띠야 껍질”로 나의 연약하고 소중한 자아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세상의 요구에 부응해 줬으니 이젠 거기서 벗어나 쉬는 것이다. 마침내 세상이 나를 기꺼이 도와주려는 것만 같았다.

내향적인 사람들이 읽은 책의 권수와, 퇴근 후 한잔하러 가지 않는 사람들이 소비한 칵테일 잔 수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는 없다. 그러나 잠옷 차림으로 집에 머무름을 찬양하는 기사와 소셜 미디어들의 범람을 보면, “내향적인 사람”이 고독한 총잡이보다는 풍족한 내면 생활을 누리는 사색가를 암시하게 되어 열광했던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구나 싶다.

사회는 무례함을 변명하고자 사회 진화에 달려들었던 사람들에 대한 다채로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낭만파 시인들에서 초월주의자, ‘사랑의 여름’의 히피들까지,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타고난 내면에 진실하겠다는 미명 하에 소위 선행의 가식이라는 것을 거부했다. 예의범절이란 타성에 불과했다. 논쟁이 진전되자 예의란 더 깊은 사귐이라 할 만한 것에 장애물일 뿐인 것이 되었다.

또 다른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 더 깊은 사귐이라는 게 사실은 심플하다. 험난한 매 만남마다 새로 만들거나 고쳐 매야 하는, 좀 더 느슨한 매듭들. 인생은 대체로 지인과 낯선 이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수많은 관계들이 골치아픈 카테고리들로 나뉜다. 특이하거나 범접할 수 없는 이들, 우리가 적극적으로 싫어하는 이들, 과거 이어지지 못한 이들. 그렇게 애를 써서까지 우리가 얻어내야 할 것이 무엇이길래?

밝혀진 대로라면, 아주 많은 것들을 얻는다. 내가 낯선 이들과의 모임에 불참하면, 나는 내 주변 개인들에게 조금 무례한 정도가 아니라, 더 넓게 보면 미개해지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에게서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록, 우리의 사회도 고립되고 서로 분리되기 쉬워진다. 개 산책 공원이나 자녀들의 하키 시합에서의 가벼운 만남들은 사회적, 경제적 장벽을 넘어설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나의 작은 세상을 넓혀 주고 세상을 구성하는 서로 겹친 비누 방울들이 된다.

꼭 모든 힘든 상황들을 피하지 않더라도 우리 스스로의 내향성을 존중하고, “조용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케인 양에게 질문을 했었다. (십대들의 내향성에 대한 인터뷰 도중에 있은 일이다.) 내향적인 사람이 이기적이라, 선을 넘어 반사회적 행동이 될 위험을 무릅쓴다면? 만약 그럴 수도 있다면, 사실상 그냥 무례한 것이 되나요? 그녀는 웃으며 동의했다. 이렇게도 말했다. “당신의 불편함에만 몰두해 있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룹이 하는 일을 나도 꼭 해야 한다고 느낄 필요는 없어요,”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모임에 나타나지 않거나 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본의 아니게 누군가의 감정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둔다면 타인에게 다가가기가 좀더 수월해질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이 실제로도 우리에게 좋을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늘 잘 알지는 못하며, 그렇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가령, 우리는 출퇴근길의 고독을 선호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낯선 이와의 만남에서 더 긍정적인 경험을 한다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꼭 읽던 책을 버려둔 채 옆자리 사람과 손자들의 장점에 관해 한 시간씩 토론을 벌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우아하고 짧은 대화와 헤드폰 속으로의 도피, 둘 다 할 수 있으니까.

행동 심리학자 라지 라구나탄은 그의 저서 ‘그렇게 똑똑하다면서 왜 행복하지 않니?’ If You’re So Smart, Why Aren’t You Happy?에서 친사회적인 행동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든다는 -심지어 그 행동에 물질적 비용이 들더라도- 사실을 시사하는 연구들을 이야기한다. 유아들은 원숭이 인형에게 자기 비밀장소의 보물을 선물할 때 가장 행복하며, 빈곤한 국가든 부유한 국가든 성인들은 자기 돈을 자신을 위해서보다는 타인들을 위해 썼을 때 더욱 행복을 느낀다고 보고되었다.

수년 전 나는 상습적으로 지각을 했다.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나는 시간 관리 전문가에게 말했다. (나는 작가들이 그러하듯, 잡지 기사에 노력을 쏟았었는데, 이것이 나에게 전문가의 도움을 구할 구실이 되었다)

“비행기를 놓쳐보신 적은 있나요?” 그녀가 질문했다. 나는 그런 적은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네요. 그냥 당신이 자기 일에 더 신경쓰고 있는 것 뿐입니다.”

내가 선천적으로 내성적이고, 군중 속에서보다는 혼자가 더 편안할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나는 내 천성에 휘둘리지 않는다. 공손하게 행동하지 못하거나, 즐거울 것 같지 않은 대화나 모임을 기피하거나, 그냥 잠옷 차림으로 집에 틀어박히는 행동에 갖다붙일 핑계거리는 많이 있다. 너무도 많은 그러한 일들이 결국 단 한 마디로 요약된다: 우리는 타인보다 자신을 더 신경쓰는 것이다.

그것은 내향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이기심의 흔한 한 형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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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오역 의역 난무일 듯..언젠가 내향성 유행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던 기억이 있는데, 그게 아마 저 때였던 모양이구나(…) 콰이어트라는 책은 들어는 봤지만 그게 그 내용인 줄은 몰랐다.

아무튼 이런 이야기들은 늘 비슷한 결론으로 끝나는 듯하다. “타인 없이는 살 수 없다” “결국 친사회적인 삶이 누구에게나 더 행복한 것이다.”  뭐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병적이지 않은 이상 전혀 외로움을 신경쓰지 않는 사람을 정말로 본 일이 없다. 사람이 싫고 필요없다는 사람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결국은 솔직하지 못한 것이…맞는 것 같다. 타고난 성격 탓에 어쩔 수 없다며, 싫은 일은 피할 수 밖에 없다는 태도도 이기적인 것…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는 동의하는데,(비행기까진 아니고 KTX는 많이 놓쳐봤지만;;;)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달지ㅜㅜ 나는 특히 통화(..)와 실시간의 대화, 단체 모임같은 것에 좀 공포가 있고 그래서 피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게 바뀌는 것이 정말로 쉽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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